
은을 칠한 도자기들을 볼 때 은은 ‘장식인가, 표현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흙으로 만들고, 유리로 씌운 고온을 견뎌낸 이 물성을 은으로 마무리하는 것의 이야기는
이유도 있고, 납득도 된다.
은칠은 사치스러움을 경계하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금,은 식기를 금지하여 생겨난
도공들의 기술로 기지를 발휘한 러스터 기법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렇게 유럽으로 건너간 기법이 도자기에 진짜 ‘은’칠을 하는 현재 모습까지 이어진다.
지금은 러스터 은을 만든 회사가 이태리와 독일이 있다.
반면 동양에서의 은칠 기법은 매우 드물었고, 장식과 기능을 위해 분처럼 칠하거나
실제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식을 부조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에 이르러 도자기에 은을 칠하는 건 역사적 배경이나 기능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성형이 (비교적) 자유로운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원하던 메탈릭한 효과를 위한 목적에 가깝다.
나도 그런 효과를 보기 위해 은칠 작업을 하기로 했고, 방법은 알지만 생소한 마음에 은 작업을
하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업이 까다로울 거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원래부터가 맑게 광이 나는 은빛을 원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까다로움이 결과물에 이로움이 되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몇 가지의 기물은 그저 ‘메탈릭하면 예쁠 것 같아, 내가 메탈을 다룰 줄 모르니 이렇게 은을 칠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작업했지만, 사실 은칠의 이유는 굴곡의 그림자를 위함이었다.
거친 표면의 메탈이 굽어진 면을 지나면서 얼마나 쨍한 명암을 남기는지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다.
아마도 반사면으로 이어지는 극단적인 경계선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 효과를 그리며 기물의 형태가 정해지기도 했는데, 이 또한 재밌는 과정이었다.




옷을 입히듯 전체를 감싸는 것 보다 드로잉을 하거나, 경계를 또렷이 해 흙의 물성이 함께 드러나도록
하는 작업이 특히 즐거웠다.


이 시기 작업에서 늘 고수하던 '개념으로부터, 이야기로부터' 라는 구상법을 벗어나
하나의 재료가 기물의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 놓는지, 또 앞으로 이 재료가 어떤 확장성을 가지고
쓰일지 기대하게 되는 경험이었다.
예 _ 이어지는 글에서 나올 기물, ‘시든 꽃’이 ‘은방울 꽃’이 되는 그런 경험.
